SF & 판타지/또 다른 시간 속으로

복제 검치 호랑이와 앙겔루스 노부스

OneTiger 2021. 1. 1. 20:00



'미래로 돌아가다(Back to the Future)'라는 영화 제목과 달리, 어떤 철학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미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이미 과거가 지나갔기 때문에, 과거는 사라졌습니다. 사라진 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직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미래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를 겪지 못합니다. 인간이 미래를 겪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는 흐릅니다. 현재는 계속 과거가 됩니다. 인간이 현재를 인식하는 순간, 이미 현재는 과거가 됩니다. 과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순간은 아주 행복해! 시간아, 멈추어라!" 아니,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행복에 빠진다고 해도,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악어가 시계 소리를 계속 퍼뜨리는 것처럼,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현재는 과거가 됩니다. 사라진 과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철학과 달리, 많은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인식합니다. 만약 과거와 현재,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건 사이언스 픽션에게 커다란 타격을 미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시간 흐름에게 기반합니다.



어슐라 르 귄이 SF 소설 <어둠의 왼손>과 판타지 소설 <어스시의 마법사>를 쓴 것처럼, SF 독자들과 판타지 독자들이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함께 좋아하는 것처럼, SF/판타지 경계선에서 <종말 문학 걸작선>이 서있는 것처럼, 종종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친숙한 짝궁이 됩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친숙한 짝궁이기 때문에, 두 장르는 여러 교집합들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두 장르가 교집합들을 형성한다고 해도, 시간 흐름은 가장 커다란 차이입니다. 판타지에서 주된 소재는 마법입니다. 오랜 옛날부터, 민담들은 마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류 문화는 마법을 이야기했습니다. 마법은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판타지에서 마법이 주된 소재이고, 마법이 아주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판타지는 과거로 돌아갑니다. 판타지는 복고적입니다. 아무리 판타지 소설이 미래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미래보다 마법이 핵심 소재이기 때문에, 판타지는 복고적입니다. 판타지와 달리, 사이언스 픽션에서 주된 소재는 진보입니다. 진보는 시대가 앞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시대가 앞으로 나가기 때문에, 시대는 미래로 흐르고,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전망합니다.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진보적입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판타지가 복고적이고 사이언스 픽션이 진보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에게 보수를 뒤집어씌우고 진보를 역행할지 모릅니다. 비록 마법이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해도, 판타지는 마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미래를 바라볼지 모릅니다. 판타지는 오래된 것이고,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전망하나, 이건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스타십 트루퍼스>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남자들이 육중한 강화복들을 입고 많은 적군들을 죽인다고 묘사합니다. 이 소설에서 여자들은 비중을 거의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학살을 정당화합니다. <스타십 트루퍼스>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이 사이언스 픽션은 병사들을 보여주고 학살을 정당화합니다. <스타십 트루퍼스>와 달리, <정령섬>은 신화 판타지입니다. 이 보드 게임은 원주민 사회에서 여자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설정합니다. (천둥 정령은 원주민 여자와 비슷합니다.) <정령섬>은 학살과 오염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보드 게임은 복원과 치유를 이야기합니다. <스타십 트루퍼스>는 서구 제국주의를 간과하나, <정령섬>은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합니다. SF 소설보다 <정령섬>은 훨씬 진보적입니다.



<스타십 트루퍼스>보다 <정령섬>이 진보적인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에서 진보와 보수는 고정적이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는 얼마든지 진보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마법은 아주 오래된 것이고, 진보는 미래를 전망합니다. 판타지에서 주된 소재는 마법이고, 사이언스 픽션에서 주된 소재는 진보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진보를 좋아한다면, 이 사람들은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으로 기울어질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미래를 전망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시간 흐름에게 기반합니다. 시대는 미래로 흐릅니다.

 

시대가 미래를 향해 흐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전망합니다. 만약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전망하지 못할 테고, 이건 사이언스 픽션에게 너무 커다란 타격을 미칠 겁니다. 이건 오직 사이언스 픽션만 시간 흐름에게 기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 이외에 다른 많은 서사들은 시간 흐름에게 기반합니다. 시간 흐름에서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서사를 진행하는 동안, 서사는 시간 흐름에게 필연적으로 기반합니다. 김금희 작가는 <너무 한낮의 연애>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시간 흐름에게 기반합니다.



단편 소설 주인공이 햄버거를 먹고 연극 현수막을 바라보는 순간, 시점은 과거로 돌아갑니다. 단편 소설 시점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시점이 움직이는 것처럼, <너무 한낮의 연예>는 시간 흐름에게 기반합니다. <너무 한낮의 연애>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이게 SF 단편 소설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너무 한낮의 연애>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나, 이 단편 소설은 시간 흐름에게 기반합니다. 비단 <너무 한낮의 연애>만 아니라 많은 주류 문학들 역시 시간 흐름에게 기반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서사는 시간 흐름을 혼자 차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 한낮의 연애>는 미래를 전망하지 않습니다. <너무 한낮의 연애>는 미래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비단 <너무 한낮의 연애>만 아니라 다른 많은 서사들은 미래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거의 유일하게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묘사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2077년 메트로폴리스 나이트 시티를 이야기하고, 나이트 시티에서 사이보그들과 비행 자동차들이 돌아다닌다면, 독자는 이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분류할 겁니다. 2077년 나이트 시티가 SF 설정이 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전망을 거의 혼자 차지합니다. 다른 서사들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시간 흐름은 비단 미래만 아니라 과거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낡은 것에게 기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법이 아주 오래된 것이고, 판타지에서 마법이 주된 소재이기 때문에, 판타지 독자는 이 장르가 낡은 것에게 기반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아무리 판타지 소설이 2077년 미래에서 마법사가 주문을 시전한다고 이야기한다고 해도, 판타지에서 핵심은 2077년 미래보다 마법 주문 시전입니다. 고대 인류 문화는 거대 도시에서 사이보그가 비행 자동차를 탄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고대 인류 문화는 마법을 이야기했습니다.

 

고대 인류 문화가 마법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무리 판타지 소설이 2077년 마법사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핵심은 미래(2077년)보다 낡은 것(마법)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핵심은 새로운 것(2077년, 메트로폴리스, 사이보그와 비행 자동차)이나, 판타지에서 핵심은 낡은 것입니다. 판타지와 달리,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과거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과거를 미래에게 투사합니다. 검치 호랑이는 과거입니다. 이미 검치 호랑이가 멸종했기 때문에, 검치 호랑이는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유전 공학 기술이 검치 호랑이를 복원한다면, 이건 진보가 됩니다.



검치 호랑이 그 자체는 낡은 것(과거)이나, 유전 공학 기술이 검치 호랑이를 복원하고, 유전 공학이 진보이기 때문에, 복제 검치 호랑이는 진보(새로운 것)입니다. 복제 검치 호랑이가 진보가 되는 것처럼, 비록 사이언스 픽션에서 시간 흐름이 과거를 포함한다고 해도, 이 과거는 낡은 것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이 됩니다. 이미 검치 호랑이는 멸종했으나, 심지어 사이언스 픽션은 사라진 것조차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시간 흐름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시대가 미래로 흐르기 때문에, 심지어 낡은 것조차 새로운 것이 됩니다.

 

심지어 낡은 것조차 새로운 것이 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앞을 바라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고개를 뒤로 돌린다고 해도, 결국 사이언스 픽션은 앞을 바라봅니다. 앞을 바라보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고개를 뒤로 돌립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핵심은 뒤(과거)보다 앞(미래)입니다. 진보는 시대가 앞으로 나간다고 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뒤보다 앞을 중시합니다. 뒤보다 앞이 핵심이기 때문에, SF 관념은 앞을 위해 뒤가 나타난다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뒤는 보조적입니다. 앞을 위해 뒤(과거)는 존재합니다.



앞(미래)을 위해 뒤는 존재합니다. 미래를 위해 과거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가 무엇이 되든, 이 사고 방식은 미래가 과거를 정당화한다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미래를 위해 과거가 존재하기 때문에, 만약 미래가 정당하다면, 과거가 무엇이 되든,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제 검치 호랑이가 과거보다 미래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이 낡은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처럼, 결국 핵심이 과거보다 미래이기 때문에, 과거가 무엇이 되든,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제 검치 호랑이가 뒤보다 앞에 속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이 앞을 바라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앞입니다.

 

앞이 중요하기 때문에, 뒤가 무엇이 되든, 뒤는 부차적입니다. 뒤가 부차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뒤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오래된 것입니다. 과거는 사라진 것입니다. 누가 오래된 것, 사라진 것에게 관심을 기울이나요? 만약 어떤 사람이 과거를 부르짖는다면, 이건 너무 케케묵은 사고 방식일 겁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에게 손가락이 있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이게 너무 케케묵었다고 손가락질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거가 부차적이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릅니다. 과거가 계속 사라지고, 미래가 계속 다가오기 때문에, 분명히 과거보다 미래는 훨씬 중요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고개를 돌리기보다 앞을 바라보고, 이건 케케묵지 않습니다. 복제 검치 호랑이가 과거보다 미래에 속하는 것처럼, 앞을 바라보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고개를 뒤로 돌리고,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고루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뒤를 바라본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이 사람에게 손가락질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본주의는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립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과거를 무시합니다. 과거는 너무 낡은 것이 됩니다.

 

자본주의는 미래가 자본주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는 미래에서 자본주의가 무너진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미래에서 자신이 무너진다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공산주의로 이어질 겁니다. 공산주의는 미래에서 자본주의가 무너질 거라고 예측하거나 자본주의가 무너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공산주의가 예측하든, 아니면 공산주의가 주장하든, 공산주의는 미래에서 자본주의가 무너진다고 묘사합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대조적입니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너무 혐오합니다. 자본주의는 미래에서 자신이 무너질 거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부유합니다. 자본주의는 미래가 자본주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가 부유하고, 미래가 자본주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미래는 훨씬 부유할 겁니다. 미래가 훨씬 부유하기 때문에,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장 경제와 보이지 않는 손은 훨씬 커다란 부를 창출할 겁니다. 오직 미래만 중요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뒤보다 앞을 중시할지 모르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습니다. 아니, 아무리 자본주의가 고개를 뒤로 돌리기 원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감히 고개를 뒤로 돌리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자본주의는 엄청난 참상을 마주칩니다. 왜 자본주의가 엄청난 참상을 마주치나요? 갑자기 하늘에서 자본주의가 뚝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세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중세가 계몽주의로 흐르고 근대로 흐르는 동안, 자본주의는 나타났습니다. 왜 중세가 계몽주의로 흘렀고, 왜 계몽주의가 근대로 흘렀나요? 어떻게 계몽주의와 근대, 자본주의가 나타났나요? 중세가 근대로 흐르는 동안, 무엇이 변화를 유발했나요? 여러 대답들 중에서 하나는 대항해 시대입니다. 아니, 잠깐. 왜 대항해 시대가 대항해 시대인가요?



아메리카 사람들이 카누를 건조했고, 대서양을 건넜고, 유럽 대륙으로 건너갔나요? 아메리카 카누가 유럽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이게 대항해 시대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유럽 범선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건 대항해 시대입니다. 대항해 시대는 서구 중심주의입니다. 오직 서구 관점에서만 이건 대항해 시대입니다. 아메리카 사람들이 유럽으로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메리카 사람들이 유럽 대륙을 '발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메리카 사람들 관점에서 이건 대항해 시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이것을 대항해 시대라고 부르고 서구 중심주의를 선택하나요?

 

대항해 시대는 끔찍한 식민지 수탈로 이어졌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구 문명은 식민지를 수탈했고 엄청난 부를 얻었습니다. 만약 서구 문명이 식민지를 수탈하지 않았다면, 노예 무역과 플랜테이션 농업과 가격 혁명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노예 무역과 플랜테이션 농업과 가격 혁명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서구 문명은 막대한 부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서구 문명이 막대한 부를 얻지 못했다면,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거나, 자본주의는 다르게 나타났을 겁니다.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수탈은 나쁜 것입니다.



식민지 수탈은 끔찍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나쁜 것, 자본주의와 끔찍한 것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양쪽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나쁜 것이고 끔찍한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고개를 돌리고 뒤를 바라볼 때, 자본주의는 엄청난 참상, 식민지 수탈, 나쁘고 끔찍한 것과 마주칩니다. 자본주의는 이 과거를 지워야 합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이 과거를 지우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끔찍하고 나쁜 것이 될 테고,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싫어할 겁니다.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과거를 지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과거가 낡은 것이라고 무시하고 은폐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는 비롯했고, 현재는 미래로 흐릅니다. 과거에서 현재가 비롯했기 때문에, 식민지 수탈(과거)에서 현재(자본주의)는 비롯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부정하기 원합니다. 사람들이 과거를 바라볼 때, 이 과거는 미래를 위한 과거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과거에서 현재가 비롯했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현재를 위해 과거가 존재한다고 간주합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고, 현재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과거는 끔찍한 식민지 수탈보다 대항해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구 중심주의를 선택하고 식민지 수탈보다 대항해 시대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는 과거를 무시합니다. 자본주의는 현재를 위해 과거가 존재한다고 간주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는 비롯하나, 자본주의는 거꾸로 떠벌입니다. 자본주의가 추악한 과거를 지우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과거가 부차적이라고 세뇌합니다. 심지어 학교 교과서들조차 세뇌에 빠지고 대항해 시대를 운운합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미래를 위해 과거가 존재한다고 간주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자본주의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미래를 맹목적으로 바라본다면, 자본주의는 사이언스 픽션이 함정에 빠졌다고 음흉한 미소를 지을 겁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미래를 위해 과거가 존재한다고 간주한다면, 앙겔루스 노부스는 이것을 지적할 겁니다. 앙겔루스 노부스는 과거 없이 미래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분명히 과거는 사라지고, 미래는 다가오고, 결국 우리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건 미래를 위해 과거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본다."와 "미래를 위해 과거는 존재한다."는 다릅니다. 우리가 미래를 바라볼 때,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가 비롯하고 현재가 미래로 흐른다고 고려해야 합니다. 앙겔루스 노부스는 이게 훨씬 총체적인 관점이라고 호평합니다.





※ 게임 <프레히스토릭 킹덤> 스크린샷 출처: Blue Meri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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