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포레스트>, 수호 눈표범, 과장된 감정 표현
[감정은 이 아이스 크림을 선택합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입니다.]
초콜릿 아이스 크림은 달달합니다. 달달한 맛 덕분에, 이건 커다란 인기를 누립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초콜릿 아이스 크림을 먹는다면, 이 아이스 크림이 달달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기분이 좋다고 느낄 겁니다. 기분이 좋은 것처럼, 초콜릿 아이스 크림에게 오직 영양분들만 전부가 아닙니다. 영양분들보다 감정(좋은 기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 아이스 크림을 선택합니다. 아니, 영양분들보다 좋은 기분은 (이 아이스 크림을 먹기 위한) 훨씬 커다란 이유인지 모릅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아무리 이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오직 이것만으로 우리는 살아가지 않습니다. 감정과 함께,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들에서 이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니, 이성보다 감정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비록 이성보다 감정이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감정과 함께,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늘 헤어졌어요. 우리 헤어졌어요. 내 맘 알 것 같다면, 옆에서 같이 울어줘요. 나는 안 되나 봐요. 역시 아닌가 봐요. 얼마나 더 울어야 제대로 사랑할까요~♬" 이 노래 화자는 함께 울자고 호소합니다. 이 화자가 우는 것처럼, 감정으로 인간들은 살아갑니다.
이별은 재앙이 아닙니다. 이건 물리적인 피해가 아닙니다. 비록 연인이 헤어진다고 해도, 지구 생물권은 멸종하지 않습니다. 비록 연인이 헤어진다고 해도, 산호초들은 탈색하지 않고, 미세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늘어나지 않고, 병충해는 식량 생산 그래프를 떨어뜨리지 않고, 살인적인 폭염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이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노래 <오늘 헤어졌어요>에서 화자가 헤어졌기 때문에, 화자는 함께 울자고 호소합니다. 비록 이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아…, 화자는 울음을 멈추지 못합니다. 화자가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커다란 감정과 함께, 우리는 살아갑니다.
커다란 감정으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감정을 과장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감정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과장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감정을 과장할 때, 불가능은 흔한 표현입니다. 감정을 과장하기 위해 우리는 불가능을 표현합니다. 현실에서 어떤 것들은 불가능합니다. 현실에서 이것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들을 표현할 때, 우리는 현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넘어서기 때문에, 감정 역시 현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감정이 현실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건 훨씬 거대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 거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시시오 사츠키, 너는 나에게 너무 많은 고구마들을 먹였어." 어라, 이 문구가 무슨 뜻인가요? 이 문구는 시시오 사츠키가 너무 많은 고구마들을 먹였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요? 야마모리 미카는 <한낮의 유성>을 그렸습니다. <한낮의 유성>은 로맨스 학원 만화입니다. 요사노 스즈메는 이 만화의 주인공입니다. 이 주인공은 고등학생입니다. 시시오 사츠키는 고등학교 선생님입니다. 요사노 스즈메와 시시오 사츠키, 고등학생과 선생님은 사랑에 빠집니다. 이건 일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아, 세상에,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랑을 비난할 겁니다. 두 사람은 커다란 비난에 부딪힐 겁니다.
요사노 스즈메와 시시오 사츠키가 커다란 비난에 부딪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쉽게 나가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한낮의 유성>은 다소 지지부진합니다. 요사노 스즈메보다 시시오 사츠키는 어른입니다. 하지만 시시오 사츠키, 이 어른 역시 지지부진합니다. 시시오 사츠키가 지지부진하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이 등장인물이 답답하다고 느낍니다. 시시오 사츠키가 답답하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이 등장인물이 고구마를 먹인다고 표현합니다. 어라,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현실에서 만화 독자는 살아갑니다. 만화 독자와 달리, 현실에서 시시오 사츠키는 살아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야마모리 미카는 살아갑니다. 이 만화가와 달리, 시시오 사츠키는 진짜 인간이 아닙니다. 시시오 사츠키는 만화 등장인물, 허구적인 등장인물입니다. 오직 만화 세계에서만 이 인간은 살아갑니다. 어떻게 만화 등장인물이 진짜 인간에게 고구마를 먹일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비록 이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만화 독자는 시시오 사츠키가 고구마를 먹인다고 표현합니다. 왜 만화 독자가 이것을 표현하나요? 이게 감정을 과장하기 때문입니다. 고구마는 텁텁합니다. 특히, 밤 고구마는 훨씬 텁텁합니다. (밤) 고구마가 텁텁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먹을 때, 우리는 갑갑하다고 느낍니다.
고구마가 갑갑하기 때문에, 이건 갑갑한 마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한낮의 유성>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한낮의 유성>이 답답하다고 느낍니다. 고구마가 갑갑한 마음을 가리키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시시오 사츠키가 이것을 먹인다고 표현합니다. 갑갑한 마음은 추상적인 감정입니다. 이게 추상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이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과 달리, 고구마는 가시적인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것을 먹기조차 합니다. 우리에게 육체들이 있기 때문에, 고구마는 훨씬 물질적인 대상입니다. 아하~, 이 먹거리는 갑갑한 마음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고구마가 갑갑한 마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만화 독자는 시시오 사츠키가 고구마를 먹인다고 표현합니다. 비록 이 만화 등장인물이 진짜 인간에게 고구마를 먹이지 못한다고 해도, 비록 이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갑갑한 마음을 강조하기 위해 만화 독자는 불가능을 표현합니다. 만화 독자가 이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불가능은 감정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흐음,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이 표현을 과장보다 비유라고 분류하는지 모릅니다. "너는 나에게 고구마를 먹였어."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불가능이 아닙니다. 만화, 허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비유(갑갑한 마음=고구마)입니다.
만화, 허구와 상관없이, 우리는 갑갑한 마음을 고구마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갑갑한 마음=고구마'이기 때문에, 이 표현은 과장(불가능)보다 비유입니다. 이 표현이 과장이든, 비유이든,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것을 동원합니다. 갑갑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만화 독자가 고구마를 동원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것을 동원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동원할 때, 이건 '불가능'일 수 있습니다. "어휴~, 수구 꼴통 국회 의원들은 천벌을 받을 거야." 이 문구는 천벌을 운운합니다. 어라,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현실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천벌을 내리나요?
[시시오 선생님(허구적인 등장인물)은 만화 독자에게 고구마를 먹이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초월적인 존재는 천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이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게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천벌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국힘당이 증명하는 것처럼, 수구 꼴통 국회 의원들은 악랄합니다. 그들은 너무, 너무 악랄합니다. 천벌은 이 의원들이 너무, 너무 악랄하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비록 현실에서 천벌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이 표현이 악랄한 수구 꼴통 의원들을 부각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천벌을 운운합니다. "수구 꼴통 의원들은 너무, 너무 악랄해."보다 "수구 꼴통 의원들은 천벌을 받을 거야."는 감정을 강조합니다.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것을 동원합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보드 게임입니다. 이 보드 게임은 삼림 정령들을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삼림 정령들이 됩니다.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삼림 정령들은 불타는 악마를 몰아내고 삼림을 수호합니다. 삼림을 수호하기 위해 이 정령들은 다양한 동물들을 소환합니다. 현실에서 삼림 정령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불타는 악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좌익들은 국힘당 의원들이 악마들이라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비록 그들이 너무 악랄하다고 해도, 그들은 진짜 악마들이 아닙니다. 좌익들이 인간들인 것처럼, 국힘당 의원들은 인간들입니다. 불타는 악마처럼, 현실에서 수호 눈표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엄청난 산불이 발생했을 때, 이건 너무 심각한 재앙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산불 때문에, 1,100만 헥타르 면적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 산불 때문에, 시드니 생태학자들은 10억 동물들이 죽었다고 추론합니다. 1,100만 헥타르 면적이 잿더미가 되는 것처럼, 10억 동물들이 죽은 것처럼, 오스트레일리아 산불은 너무 심각한 생태학 재앙입니다. 왜 이 심각한 생태학 재앙이 발생했나요?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환경 운동들은 지구 가열화가 산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합니다. 지구 가열화는 가뭄을 유발합니다. 가뭄은 산불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비록 지구 가열화가 이 엄청난 산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해도, 지구 평균 기온이 상승하기 때문에, 이상 가뭄은 커다란 산불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겁니다. 지구 가열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산불은 또 다른 생태학 재앙이 되는지 모릅니다. 또 다른 생태학 재앙을 막기 위해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에 대처해야 합니다. 이 재앙에 대처하기 위해 인류 문명은 탈성장 사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문제는 세계화 자본주의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오직 돈, 돈, 돈, 돈, 돈벌이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어휴~, 이 경제는 탈성장 사회를 혐오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이 사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탈성장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인류 문명이 이 경제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특히, 기후 정의를 실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인류 문명이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다시, 엄청난 산불은 10억 야생 동물들을 죽이는지 모릅니다. 아니, 이 산불은 훨씬 많은 야생 동물들을 죽이는지 모릅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수호 동물들이 불타는 악마를 몰아낸다고 이야기합니다. 수호 동물들이 불타는 악마를 몰아내는 것처럼, 수호 눈표범이 엄청난 산불을 막을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현실에서 이 동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약 현실에서 삼림 정령들이 존재한다면, 이 정령들은 이 경제를 싫어할 겁니다. 삼림 정령들은 세계화 자본주의가 너무 악랄하다고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기후 변화가 훨씬 위험한 수준을 넘어선다면, 지구 생물권은 어마어마한 위기에 빠질 겁니다. 수구 꼴통 국회 의원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악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심지어 이 독재 국가조차 지구 생물권을 어마어마한 위기에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 연방보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훨씬 악랄합니다. 삼림 정령들은 세계화 자본주의가 훨씬 악랄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삼림 정령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보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훨씬 악랄하다고 해도, 현실에서 삼림 정령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본주의가 또 다른 산불을 유발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수호 눈표범은 이 재앙을 막지 않습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동화, 판타지입니다. <리빙 포레스트>처럼, SF/판타지는 자연 신성을 상상합니다. 특히, 어머니 자연은 자연 신성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대지 모신을 상상하든, 중세 판타지가 자연 신성을 상상하든, 이건 그저 상상에 불과합니다. 현실에서 어머니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어머니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현실에서 수호 눈표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단 수호 눈표범만 아니라 다른 수호 동물들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수호 코뿔소, 수호 오리 너구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수호 눈표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동물은 '불가능'입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불가능을 표현합니다. 왜 이 판타지가 불가능을 표현하나요? 비단 <리빙 포레스트>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판타지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거대 괴수가 대지 모신이라고 설정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자연을 복원합니다.
오오~, 사이언스 판타지는 거대 괴수가 자연을 복원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고 해도, 비록 환경 재앙이 심각하다고 해도, 거대 괴수는 생물 다양성을 복원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거대 괴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대 괴수는 불가능입니다. 왜 사이언스 판타지가 불가능을 표현하나요? 거대 괴수가 감정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갑갑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만화 독자가 고구마를 언급하는 것처럼, 천벌이 악랄한 수구 꼴통 의원들을 강조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는 원대한 자연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자연은 원대합니다. 이건 풍요롭습니다. 문자 그대로, 거대 괴수는 거대합니다. 거대 괴수가 생명력을 발산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는 풍요롭습니다. 자연과 거대 괴수는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자연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적어도, 자연에게는 인격(캐릭터)이 없습니다. 거대 괴수에게는 인격이 있습니다. 거대 괴수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거대 괴수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는 자연을 의인화합니다. 아니, 거대 괴수가 자연을 의인화하기 전에, 이미 고대 신화는 자연을 의인화했습니다. 어머니 자연, 대지 모신은 자연을 의인화합니다.
대지 모신이 자연을 의인화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는 원대한 자연을 가리킵니다. 만화 독자가 갑갑한 마음보다 고구마를 운운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 그 자체보다 거대 괴수(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감정(원대한 자연, 풍요로운 자연)을 과장하기 위해 인간은 다른 것(거대 괴수)을 동원합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다르지 않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아주 신비롭습니다. 하지만 생물 다양성에게는 인격이 없습니다. 생물 다양성과 달리, 수호 눈표범에게는 인격이 있습니다. 감정(생물 다양성은 아주 신비롭다)을 과장하기 위해 <리빙 포레스트>는 다른 것(수호 동물)을 동원합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수호 눈표범, 수호 고릴라, 수호 오리 너구리를 보여줍니다. 다른 지역들에서 이 야생 동물들은 살아갑니다. 중앙 아시아에서 오리 너구리는 살아가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눈표범은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강물에서 고릴라는 살아가지 않습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서식 지역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비록 다른 지역들에서 세 야생 동물들이 살아간다고 해도, 삼림 정령들은 이 수호 동물들을 소환합니다. 삼림 정령들이 다양한 동물들을 소환하기 때문에, 눈표범, 고릴라, 오리 너구리는 협력합니다. 아~, <리빙 포레스트>는 생물 다양성을 강조합니다.
[수호 동물들, 이 불가능은 생물 다양성이 신비롭다고 강조합니다.]
비록 현실에서 눈표범, 고릴라, 오리 너구리가 똑같은 지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리빙 포레스트>는 수호 눈표범, 수호 고릴라, 수호 오리 너구리를 배치하고 생물 다양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게임 제작자들이 이것을 의도했나요?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해 게임 제작자들이 수호 눈표범, 수호 고릴라, 수호 오리 너구리를 설정했나요? 흠, 글쎄요. 비록 게임 제작자들이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보다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는 원대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원대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이 원대한 것에게 기반하고 게임 제작자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을 강조합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게임 플레이어가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을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이 <리빙 포레스트>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 게임 플레이어들은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을 느끼지 않는지 모릅니다. 감정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초콜릿 아이스 크림이 맛있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 아이스 크림을 좋아하나요?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이 초콜릿 아이스 크림을 최고라고 느끼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아이스 크림이 최고가 아닌 것처럼,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은 필연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하지만 <리빙 포레스트>에게는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을 강조하기 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 가능성을 느낄 겁니다. <리빙 포레스트>처럼,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가능성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는 자연 신성을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비록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이 이것을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해도, 생물 다양성은 중요합니다. 케이트 레이워스는 '도넛 경제 모델'을 고안했습니다. 이 모델은 질소와 인, 담수 고갈, 해양 산성화, 오존층 파괴, 대기 오염, 생물 다양성 감소가 생태계 한계라고 분류합니다.
질소, 담수 고갈, 해양 산성화, 오존층 파괴, 대기 오염처럼, 생물 다양성 감소는 생태계 한계에 속합니다. 이게 생태계 한계에 속하는 것처럼, 생물 다양성은 중요합니다. 이건 주관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이건 객관적인 과학입니다. 비록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이 신비로운 생물 다양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도, 이 게임 플레이어들은 생물 다양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부정하지 못합니다. 자연 생태계를 존중하기 위해 케이트 레이워스는 제로 성장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탈성장 사회를 혐오합니다. 양쪽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탈성장 사회를 위해 이 기후 악당은 사라져야 합니다.
※ 시시오 사츠키는 허구적인 등장인물입니다. 이 등장인물과 달리, 야마모리 미카는 진짜 인간입니다. 이 만화가처럼, 만화 독자는 진짜 인간입니다. 시시오 사츠키(허구적인 등장인물)는 만화 독자(진짜 인간)에게 고구마를 먹이지 못합니다. 이건 불가능입니다. 수호 눈표범은 똑같습니다. 현실에서 이 동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동물은 불가능입니다. 그래서 양쪽은 비슷한 위상이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수호 눈표범이 불가능이라고 비판하기 원한다면, 이 사람들은 비단 수호 눈표범만 아니라 "너는 나에게 고구마를 먹였어.", 이 문장 역시 비판해야 합니다.
"<리빙 포레스트>는 생물 다양성을 과장하지 않아. 나는 이것을 느끼지 않아. 이 보드 게임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아. 수호 눈표범은 그저 불가능에 불과해. 현실에서 이 동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휴~, 이 보드 게임은 현실적인 이야기보다 엉터리 헛소리야." 이 의견처럼, 어떤 사람들은 수호 눈표범이 생물 다양성을 과장한다고 느끼지 않는지 모릅니다. 네, 좋습니다. 비록 수호 눈표범이 과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어떤 사람들이 "너는 나에게 고구마를 먹였어.", 이 문장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에게는 수호 눈표범을 비판하기 위한 명분이 없을 겁니다.
※ 게임 <Living Forest> 사진 출처:
https://boardgamegeek.com/image/6429890/living-forest
※ 사진 <Chocolate ice cream, …> 출처: arinaja,
https://pixabay.com/photos/chocolate-ice-cream-2755456/
※ 사진 <Sweet potato, …> 출처: leecine,
https://pixabay.com/photos/sweet-potato-bob-diet-vegetables-514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