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사회 공학

<다섯 번째 계절>, 현실에서 문학으로

OneTiger 2020. 3. 1. 20:34

전통적으로 여러 문학들에서 고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거나 문학 주인공 배경이 됩니다.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대표적입니다. 이 소설에서 고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이 소설이 고아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쌍한 올리버가 스프 한 그릇을 부탁할 때, 독자들은 비참한 고아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소설 <키다리 아저씨>에서 고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이 소설이 고아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소설 분위기가 아주 밝다고 해도, 제루샤 애벗이 고아원 출신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쌍한 고아원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소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서 고아원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이 소설에서 고아원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목이 고아원에 속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비참한 고아원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소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고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무리 이 소설이 고아원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쌍한 해리 포터가 얹혀살기 때문에, 심술궂은 이모 부부와 사촌이 해리 포터를 구박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비참한 고아원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올리버 트위스트와 해리 포터는 비슷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른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이는 어립니다. 세상 풍파는 너무 험난하나, 아이는 너무 어립니다. 어른은 아이를 보호해야 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장 기본적인 경제 단위를 가족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가족을 강조합니다. 든든한 쉼터로서 가족은 아이를 보살펴야 합니다. 가족 없이, 너무 어린 아이는 너무 험한 세상 풍파에 부딪히고, 쓰러지고, 굶주리고, 깨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는 훌륭한 문학 소재입니다. 만약 문학 작가가 극적인 성장과 감동을 연출하기 원한다면, 고아는 훌륭한 소재일 겁니다.


그래서 여러 문학들에서 고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불쌍한/유쾌한 고아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올리버 트위스트>와 <키다리 아저씨>를 표절하지 않았을 겁니다. 전통적으로 고아가 극적인 성장과 감동을 연출하기 때문에, 소설 작가는 그저 고아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표절하지 않았고,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키다리 아저씨>를 표절하지 않았습니다. 네 소설들에서 사건 전개들은 크게 다르나, 네 소설들은 똑같이 고아를 이야기합니다. 전통적으로 고아가 극적인 성장과 감동을 연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한 가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고아가 불쌍한가요? 아무리 고아에게 가족이 없다고 해도, 고아가 반드시 불쌍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제루샤 애벗과 오목은 똑같이 고아이나, 제루샤 애벗은 유쾌하고 밝고, 오목은 비참합니다. 올리버 트위스트와 해리 포터는 똑같이 고아이나, 올리버 트위스트는 아주 유명한 불쌍함 아이콘이고, 해리 포터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아이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해리 포터를 바라보나, 아이들은 올리버 트위스트가 되기 원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아렌델 여왕 엘사는 고아입니다. 올리버처럼, 엘사는 고아입니다.


비록 올리버 트위스트와 아렌델 여왕 엘사가 똑같이 고아라고 해도, 올리버와 엘사는 다릅니다. 올리버는 불쌍한 아이콘이나, 엘사는 다릅니다. 올리버는 스프 한 그릇을 먹지 못합니다. 올리버는 비참하게 구걸합니다. 반면, 엘사는 얼마든지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왕궁에서 안나 공주가 초콜릿들을 신나게 처묵처묵하는 것처럼, 엘사 역시 얼마든지 먹고 마실 겁니다. 엘사는 왕족입니다. 심지어 엘사는 여왕님입니다. 비참한 거지 올리버와 엘사 여왕님은 다릅니다. 가난한 가족보다 부유한 고아 엘사는 훨씬 낫습니다. 가난하고 쓰러져가는 집구석에서 엘사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엘사처럼, 해리 포터는 비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리 포터는 유복합니다. 해리 포터가 유복하기 때문에, 많은 고아들과 달리, 빵 한 조각을 먹기 위해 해리 포터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못된 사촌이 해리 포터를 괴롭힌다고 해도, 결국 해리 포터는 호그와트 성에 속하고, 호그와트 성에서 해리 포터는 유명 인사입니다. 안나 공주가 초콜릿들을 처묵처묵하는 것처럼, 해리 포터는 얼마든지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엘사 여왕님과 달리, 해리 포터는 왕족이 아니나, 해리 포터는 귀족 자제와 비슷합니다. 제루샤 애벗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루샤 애벗은 무도회에 놀러갈 수 있습니다.


제루샤 애벗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놀러가고, 신나게 춤춥니다. 엘사 여왕과 해리 포터처럼, 제루샤 애벗은 부유합니다. 비록 제루샤 애벗이 고아라고 해도, 든든한 후원자가 제루샤 애벗을 돕기 때문에, 제루샤 애벗은 유쾌하게 살아갑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고아라고 해도, 만약 물질적인 부유함이 고아를 뒷받침한다면, 고아는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건 물질적인 부유함이 전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너무 편협한 황금 만능주의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고아에게 물질적인 부유함은 행복을 위한 기본 조건입니다. 그래서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고아원과 귀부인을 대조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루샤 애벗과 엘사 여왕과 해리 포터는 전형적인 고아가 아닙니다. 세 등장인물들은 예외적인 고아입니다. 비록 올리버 트위스트와 오목이 전형적인 고아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많은 고아들은 너무 험한 세상 풍파에 부딪히고, 깨지고, 쓰러집니다. 현실에서 고아들이 부딪히고, 쓰러지고, 깨지기 때문에, 문학 작가들은 현실을 반영하고 고아 소재를 이용합니다. 만약 현실에서 고아들이 험한 세상 풍파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다른 아이들처럼, 만약 고아들이 유복하게 살아간다면, 극적인 감동을 연출하기 위해 문학들은 고아 소재를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현실에서 문학은 비롯합니다.


현실에서 문학이 비롯하기 때문에, 문학 '배후'에는 현실이 있습니다. 독자가 문학 속의 고아를 바라보는 동안, 독자는 비단 문학 속의 고아만 아니라 현실 속의 고아를 함께 인식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많은 고아들은 비참합니다. 왜 현실에서 고아들이 비참한가요? 이 게시글에서 둘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경제 단위는 가족입니다. 자유주의 시대는 가족을 강조합니다. 동요 "아빠, 힘내세요."처럼, 가족은 아이를 보호합니다. 오직 가족만 아이를 보호합니다. 사회는 아이를 보호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가족만 존재합니다.



철벽 꼴통 마가렛 대처가 강조하는 것처럼,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아이를 돌봐주지 못합니다. 사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가족만 아이를 돌봐야 합니다. 오직 가족만 아이를 돌봐야 하나, 고아에게는 가족(보호자)이 없습니다. 아무리 대기업이 가족 같은 회사를 광고한다고 해도, 대기업은 고아를 돌봐주지 않습니다. 오직 가족만 아이를 돌봐야 하나, 대기업이 오직 입으로만 가족 같은 회사를 나불거리고, 사회가 존재하지 않고, 고아에게 가족이 없기 때문에, 고아는 가난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가난한 인간은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인간은 죄악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난이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가난한가요? 사람들이 나태하고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수구 꼴통 할배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개무시하는 것처럼, 가난은 나태와 무능입니다. 나태와 무능은 죄악입니다. 고아는 가난하고, 가난이 나태와 무능이기 때문에, 고아는 나태와 무능입니다. 나태와 무능이 죄악이기 때문에, 고아는 죄악입니다. 고아는 죄인입니다. 죄인은 행복해져서는 안 됩니다. 죄인은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다. 고아가 죄인이기 때문에, 고아는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아는 비참해야 합니다.



만약 인류 사회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실현한다면, 고아들은 비참해지지 않을 겁니다. 돌봄 노동 사회화에서 사회는 가족이 될 테고, 가족으로서 사회는 고아를 비롯해 아이들을 돌볼 겁니다. 어쩌면 사회가 가족이기 때문에, 고아라는 단어 역시 바뀔지 모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엔들리스 스카이>에서 조선소는 수상선을 건조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소는 수상선을 건조하나, <엔들리스 스카이>가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조선소는 우주선을 건조합니다. 조선소에서 우주선은 nGVF-BB 연료 전지를 장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조선소는 생체 우주선을 건조할지 모릅니다.


<엔들리스 스카이>는 생체 우주선을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림(링크)을 비롯해 여러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에게는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하기 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엔들리스 스카이> 속의 우주 어딘가에서 생체 우주선이 항해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이건 과잉 해석인지 모르나, 분명히 생체 우주선은 스페이스 오페라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조선소는 수상선보다 우주선, 심지어 생체 우주선을 건조합니다. 조선소가 생체 우주선을 건조하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조선소라는 단어는 바뀝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조선소라는 단어가 바뀌는 것처럼, 돌봄 노동 사회화에서 고아라는 단어는 바뀔지 모릅니다. 만약 단어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자유주의 사회보다 모성적인 사회에서 고아들은 비참해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위대하고 훌륭한 철벽 꼴통 마가렛 대처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돌봄 노동 사회화는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는 불가능합니다. 가족이 기본적인 경제 단위이기 때문에, 사회는 경제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돌봄 노동 사회화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여자와 남자가 함께 섹스한다고 해도, 섹스 이후, 오직 여자만 임신합니다. 임신은 여자 역할입니다. 임신은 힘들고, 임신은 여자를 제약합니다. 여자가 임신하기 때문에, 여자는 육아를 맡아야 합니다. 만약 아기가 모유를 먹어야 한다면, 수유하기 위해 여자는 자신의 시간을 소모해야 합니다. 임신, 출산, 수유, 육아는 여자를 제약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직 여자만 임신하고 수유한다고 해도, 남자 역시 아이를 돌볼 수 있습니다. 임신, 출산, 수유는 돌봄 노동의 전부가 아닙니다. 남자 역시 육아와 가사를 맡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육아를 노동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남자가 육아를 맡기 원한다고 해도, 육아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육아는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누군가는 임금 노동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자가 임신하고 수유하기 때문에, 여자보다 남자는 임금 노동자가 됩니다. 임신과 수유가 여자를 제약하기 때문에, 영리 기업은 잉여 노동 시간을 최대한 착취하지 못하고, 임신과 수유가 영리 활동(잉여 착취)을 방해하기 때문에, 영리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합니다. 임신과 수유가 잉여 노동 시간을 방해하기 때문에, 영리 기업은 여자를 싫어하거나 여자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임금 노동자들은 남자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임금 노동자를 착취해야 하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영리 기업이 잉여 노동 시간을 착취해야 하고, 임신과 수유가 잉여 노동 착취를 방해하기 때문에, 많은 임금 노동자들은 남자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이윤 창출이 가장 커다란 목표이고, 많은 임금 노동자들이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들은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여자들이 이윤 창출에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정확히 자본가 계급이 여자 노동자 잉여 시간을 최대한 착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여자들은 이윤 창출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여자를 싫어하거나 여자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여자를 싫어하거나 여자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는 보조적인 존재, 열등한 존재가 됩니다. 남자는 중요한 존재이나, 여자는 열등한 존재입니다. 자본주의에서 이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아무리 자본가 계급이 선량하다고 해도, 자본주의 작동 원리 때문에, 남자는 중요한 존재가 되고, 여자는 열등한 존재가 됩니다. 이건 윤리 문제보다 사회 구조적인 경제 문제입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자본주의가 성 차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착해진다고 해도, 구조적으로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성 차별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많은 어린이집들, 유치원들, 초등학교들은 문을 닫으나, 어른들은 회사들에 계속 나가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아이들을 돌보나요? 만약 누군가가 아이를 돌본다고 해도, 이런 혼란 속에서 보호자가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있나요? 만약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인 돌봄 노동, 국가적인 공공 육아가 존재한다면, 비록 많은 어린이집들, 유치원들, 초등학교들이 문을 닫는다고 해도, 돌봄 노동 문제는 돌파구를 찾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는 노동이 아닙니다. 육아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돌봄 노동자들은 댓가를 받지 못하고, 공공 육아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코로나 19 사태에는 적극적인 유급 육아 휴직들이 필요하나, 아무리 코로나 19 사태가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돌봄 노동들은 뒷전이고, 이윤 창출은 우선이 됩니다. 이윤 창출 없이, 인류 사회는 자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돌봄 노동들 없이, 인류 사회는 자신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돌봄 노동들은 중요하나, 이윤 창출을 위해 자본주의는 가장 필수적이고 원초적인 노동들을 개무시합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얼마나 시장 경제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지 여실히 증명합니다. 그래서 성 해방 운동은 위기 상황을 고찰하고 돌봄 노동 사회화가 필수적이라고 크게, 적극적으로 외쳐야 합니다.


하지만 자칭 페미니스트들이 돌봄 노동 사회화를 정말 적극적으로 외치나요? 허구한 날 성 평등을 떠들어대는 자칭 페미니스트들이 돌봄 노동 사회화를 크게 부르짖나요?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에 침묵하는 페미니즘이 정말 페미니즘인가요? 비열하고 추잡한 진보 정당들이 1차 세계 대전을 떠받든 것처럼, 위기 상황에서 지배 계급 앞잡이들은 본색을 드러내곤 합니다.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에 침묵하는 페미니즘은 그저 지배 계급 앞잡이에 불과할 겁니다. (심지어 위대하고 훌륭한 자칭 페미니즘께서 고작 생태학 SF 덕질 블로그 따위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인류 사회가 성 차별을 없애기 원한다면, 돌봄 노동 사회화는 좋은 대안입니다. 이건 돌봄 노동 사회화가 성 차별을 없애기 위한 만능 열쇠, 황금 열쇠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자 무급 노동은 유일한 성 차별 원인이 아니고, 인류 사회는 돌봄 노동 사회화 이외에 다른 성 해방 운동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심지어 생체 개조 기술은 모든 남자를 없애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돌봄 노동 사회화는 근본적인 대안이고, 여자 무급 노동은 근본적인 성 차별 원인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반하고 돌봄 노동 사회화를 실현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가부장 제도 사회입니다.


인류 문명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유일한 가부장 제도가 아닙니다. 인류 문명에는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여러 가부장 사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최신 판본 가부장 제도이고, 아직 인류 사회는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아들은 비참해져야 하고, 고아들은 훌륭한 문학 소재가 될 겁니다. 이렇게 현실에서 문학은 비롯합니다. 독자가 올리버 트위스트와 제루샤 애벗과 오목과 해리 포터(와 엘사)를 바라보는 동안, 독자는 문학 너머 현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공공 육아 사회를 묘사합니다. 공공 육아 사회에서 고아는 비참해지지 않을 겁니다.



공공 육아 사회에서 여자들 역시 두려움을 떨칠 수 있습니다. 공공 육아 사회에서 여자들은 자유분방한 섹스가 두렵지 않다고 느낍니다. 오히려 여자들은 자유분방한 섹스 욕구를 마음껏 해방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자 무급 노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육아와 가사를 맡기 때문에, 임신, 출산, 수유는 여자들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고아가 비참해지지 않는 것처럼, 여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학에서 고아가 중요한 소재인 것처럼, 멜로 드라마들에서 '아이가 딸린' 이혼녀/과부는 중요한 소재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혼자 맡기 때문에, 여자는 비참한 시련에 부딪힙니다.


여러 멜로 드라마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백마를 탄 왕자님으로서 멋진 남자 주인공은 '아이가 딸린' 여자를 사랑합니다. 멋진 남자 주인공에게 아이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맺어지고, 메데타시 메데타시~입니다. 왜 멜로 드라마들에서 아이가 딸린 여자가 중요한 소재인가요? 독자가 문학 너머 현실을 바라보는 것처럼, 시청자는 멜로 드라마 너머 현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임신, 출산, 수유가 여자를 압박하기 때문에, '아이가 딸린' '여자'가 세상 풍파에 부딪히기 때문에, 문학에서 고아처럼, 멜로 드라마들에서 아이가 딸린 여자는 중요합니다.



멜로 드라마들과 달리, <다섯 번째 계절> 속의 공공 육아 사회에서 '아이가 딸린' '여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여자들이 아주 자유분방하게 섹스하기 때문입니다. 공공 육아 사회에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 관념이 없습니다. 남자는 임금을 벌고, 여자는 육아와 가사를 맡고…. 이런 풍경은 없습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런 사회를 좋아할지 모릅니다. "공공 육아 사회에서 여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회가 육아와 가사를 맡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벽 꼴통 마가렛 대처는 꽥꽥 소리지를 겁니다. 수구 꼴통 할배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처럼, 마가렛 대처는 소리를 버럭버럭 지를 겁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혁명 정부 소속입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공산주의 사회가 가사와 육아를 맡기 때문에 여자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철벽 꼴통 마가렛 대처는 어떻게 사회가 존재할 수 있는지 (소리를 꽥꽥 지르고) 반박할 겁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이 공공 육아 사회를 묘사하기 때문에, 마가렛 대처는 이 소설이 사이언스 판타지, 환경 아포칼립스보다 빨갱이 소설이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만약 마가렛 대처가 <다섯 번째 계절>을 읽는다면, 마가렛 대처는 지랄지랄 발광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정말 <다섯 번째 계절>이 악랄한 빨갱이 소설인가요?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오마쥬하기 위해 소설 작가 노라 제미신이 <다섯 번째 계절>에 공공 육아 사회를 집어넣었나요? 여기에서 독자는 문학 너머 현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비록 노라 제미신이 악랄한 빨갱이 계집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혐오한다고 해도, 돌봄 노동 사회화는 근본적인 성 해방 대안입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상관없이, 현실에서 여자 무급 노동은 근본적인 성 차별 원인입니다. 그래서 비록 노라 제미신이 악랄한 빨갱이 계집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를 혐오한다고 해도, <다섯 번째 계절>은 공공 육아 사회를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문학이 비롯하기 때문입니다.